윤회. 인생은 돌고 돈다.
나는 고집이 있다. 독전적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소신이냐 독선이냐는 종이 한장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2015년 나는 "솔직한 오만함"을 내 40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때문에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번 글은 그에 대한 것이다.
2017년 12월, 나는 검사원이었다. 보안검색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하나를 바로잡는 막바지에 있었다. 이번만은 다를 줄 알았다.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 피검기관에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계획을 보내왔다. 그 조치계획을 읽어본 나는 콧웃음부터 나왔다. 수준이 낮아도 이렇게 낮을 수가! 이것이 내 첫인상이었다. 검사원으로 지적한 문제의 핵심과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계획의 핵심이 아예 달랐다. 다를 뿐더러 그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보적이었다. 의벽검색!
나는 당당히 피검기관에 적합하지 않다고 검사원으로서 입장을 그 근거와 함께 밝혔다. 나는 그로부터 4년이지난 아직도 이 입장에 대해서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더라도 내 입장은 같다! 아무리 독선적이라고 비난받을 지라도! 그런데 피검기관의 반응이 의외였다. 피검기관의 한 간부가 나를 국민신문고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고발 이유는 다른 검사원들에 비해 내가 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검사원의 의견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만큼 조치계획이 초보적이었고, 내가 지적한 문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나를 고발하겠다는 피검기관의 간부에게 대답했다. 요즘 회사생활이 지루했는데, 고발이라도 해주면 조금은 재미있어지겠노라고.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고발하기 전에 피검기관에서 제출한 조치계획을 한번 읽어보는게 좋을 것 같다고.
나는 부서장에게 피검사기관에서 나를 고발하겠다고 해왔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부서장은 그 자리에서 다른 검사원의 조치계획에 대한 검토결과 문서를 확인했고, 비슷한 검사 지적사항에 대한 유사한 조치계획에 대해 다른 검사원의 적합판정이 나가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적합판정에 자기 서명도 버젓이 있음을 확인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오리지널스라는 책에 무난한 상사와 까칠한 상사에 대한 내용이 있다. 무난한 상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현상유지에 촛점을 맞추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지만, 까칠한 상사는 문제를 항상 발견하고 개선하려기에 평상시에는 껄끄럽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나는 딱 이 상황을 경험했다.
그리고, 동료 검사원들은 나를 함께 일하면 안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불만을 늘어놓는 괴팍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이 돌고 돌아 내 귀에도 들어왔다.
고발하겠다고 오히려 당당한 피검사자. 무슨 검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밖에 못하냐는 검사기관인 내가 근무하는 회사를 감독하는 기관. 나와 같이 일 못하겠다는 동료. 나는 정말 낯선 환경에 내팽개 쳐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소속된 부서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과제에 조차 배제되었다. 왕따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부서장에게 이야기 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내가 소속된 부서에 새로운 과제가 생겼고, 다른 구성원들이 참여하는데 나는 배제되었다. 그리고, 모든 부서원이 현 참여하는 과제에서 새로운 과제로 참여율을 변경해 조정해야했고, 그걸 책임지고 관리하는 부서장은 몰랐다는 대답이 끝이었다. 그 대답이 사실이면, 직무유기 아닌가! 그런데, 부서장은 이제 문제를 알았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대답조차 없었다. 그리고 얼마뒤 그는 회사의 경영기획부라는 핵심 조직으로 부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그렇게 배웅받으며 떠난 그가 다시 그 부서로 돌아왔다. 그 부서의 현 부서장은 그를 내가 과제책임자인 과제에 배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거부해야하는 것인가? 거부한다면 그와 내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불교에서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과거의 업을 따르기보단 정도를 가라고 했다. 그 가르침을 따라 과거의 업은 과거의 업으로 삼고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나는 택했다. 그후, 한달정도가 지났고, 함께 과제를 하면서 과거의 내 부서장과 같이 일을 시작하면서, 입장은 바뀌었지만, 나는 솔직히 한 달전 내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은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되기에" 자기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말의 뜻을 요즘 정말 절실히 깨닫고 있다. 윤회의 사슬을 끊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관한 선택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체개고. 어느 길을 갔건 다 고행길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러기에, 과거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불교는 가르친다.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것이 내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하는 불교의 교훈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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