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40대의 문턱에 서있다. 공자는 일찍이 40대를 '혹'하지 않는 불혹이라고 했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여 흔들리지 않을 때라고 하였다.
굴지의 기업을 맨손으로 이루어낸 알리바바의 마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0대에는 실수를 많이하라. 30대에는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 보다 누구와 일하느냐가 중요하다. 40대에는 스스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50대에는 30대를 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주위에 혹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에서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스스로에 대해서 찬양할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사람이 생각하는 것일 수 있으며, 스스로의 영혼 속에 머물며 세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하여...
(다른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다. 즉 다른사람의 생각을 눈치채라고 시인은 노래하지 않는다.)
(다른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다. 즉 다른사람의 생각을 눈치채라고 시인은 노래하지 않는다.)
Song of Myself
월트 위트먼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우리나라의 시인 함석헌(1901~1989)은 스스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했다. 자신만의 거창하지 않는 골방같은 세계! 그 속에서 스스로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함석헌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깊은 산도 아니요 거친 들도 아니요
지붕 밑도 지하실도 아니요
오직 그대의 맘 은밀한 속에 있네
그대 맘의 네 문 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극진하신 님의 꿈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깊은 산도 아니요 거친 들도 아니요
지붕 밑도 지하실도 아니요
오직 그대의 맘 은밀한 속에 있네
그대 맘의 네 문 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극진하신 님의 꿈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거장 화가 장욱진(1917~1990)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젊잖다는 말을 싫어한다. 겸손이라는 것도 싫다. 그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러므로 솔직한 오만이 훨씬 좋다. 먼저 자기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참된 자기 것을 가질 수 있기에.
그렇다. 불혹이란 스스로를 깊이 관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존재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때때로 불안하고 때때로 다른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을 지라도 내가 나 자신으로 정의할 만큼 나를 깊이 관찰할 수 있는가? 내가 40대에 대답해야할 질문인 것이다.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젊잖다는 말을 싫어한다. 겸손이라는 것도 싫다. 그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러므로 솔직한 오만이 훨씬 좋다. 먼저 자기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참된 자기 것을 가질 수 있기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에서..)
그렇다. 불혹이란 스스로를 깊이 관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존재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때때로 불안하고 때때로 다른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을 지라도 내가 나 자신으로 정의할 만큼 나를 깊이 관찰할 수 있는가? 내가 40대에 대답해야할 질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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