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욕심을 비우면 마음보다 너른 것이 없고, 탐욕을 채우면 마음보다 좁은 곳이 없다.
염려를 놓으면 마음보다 편한 곳이 없고, 걱정을 붙들면 마음보다 불편한 곳이 없다.
-공지사항: 육아일기 등 가족이야기는 비공개 블로그로 이사했습니다.

2014년 11월 16일 일요일

아직 부처님이 더 필요한 나라 인도 - 2014. 11. 10(월)

인도 뭄바이를 2014년 11월 9일부터 16일까지 다녀왔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 인도는 아직도 부처님이 필요한 나라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지 2558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인도는 부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 승려 혜초(707~787)가 쓴 왕오천축국전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고 부자는 적다. 가는 곳마다 구걸만 하면 먹을 것이 생긴다"라고 인도에 도해서 기술되어 있다. 인도는 혜초가 다녀간지 1,500년이 지났지만 그때와 비슷하다.

거리에는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 불쌍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새까만 얼굴에 바짝마른 작은 체구의 구걸하는 어머니들과 그 주변에서 언제 씼었는지 모르는 떡진 머리를 하고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차가 다니는 큰 길가 딱딱한 보도 위를 자신의 침대 삼아 머리를 뉘고 곤히 잠든 아이들. 돌이 갓지난 우는 아이를 안고 어른도 타기 힘든 치열한 기차간에 올라 한푼 구걸을 하는 아이들. 가혹한 환경에 어린이다움을 잃어 버리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아이들.

부처님이 29세에 성밖을 나와보고 세상은 고통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닿고 출가를 하신(사문유관) 이유를 뭄바이의 빈민들을 보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초라하고 새까만 얼굴에 비해서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욱 가슴 아팠다.


첫인상
뭄바이 공항은 다른 공항과 다를 바 없었다. 시원하고 깨끗하고 말끔했다. 공항 건물 밖을 나와 처음 인도를 느꼈다. 덥고 습했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 얼마간은 잘 정리되고 말끔한 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값싼 블럭, 슬레이트, 그리고 온갖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집들과 포장지, 넝마, 쓰레기로 가득찬 길거리가 나왔다. 칠이 바래지고 녹슨 철제 창호가 달린 쓰러질 듯한 저층건물들이 그 빈민촌들 사이사이 섞여 있었다.

안갖 차들이 뒤섞여 북새통인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그려지지 않은 도로를 따라 내가 탄 택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렸다.





내가 탄 택시는 호텔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펑크가 났고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사가 직접 타이어를 바꾸어 달았다. 그 바꾸어 단 타이어도 이미 헐어 있는 곳이 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택시비
공항에서 호텔까지 약 31km를 택시로 오는데 나는 1200루피를 택시비로 지불했다. 처음 택시기사는 "prepaid"(거리를 계량하지 않고 정액으로 택시비를 지불하는 것)로 2500루피를 요구했다. 호텔에 전화해보니 약 1500루피정도가 일반적이라고 했다. 나는 1000루피로 가격을 깎았고 기사는 1200루피를 요구했다.

1000루피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돈도 인도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공항에서 인도시내로 가장 저렴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은 공항에서 Vile Parle역까지 버스나 오토라 불리우는 삼륜차로 가서 기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Vile Parle역까지 오토로 가면 미터기로 60루피 정도밖에 요금이 나오지 않으나 기사들은 항상 외국인에게 웃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뭄바이 철도는 어른들에게도 가혹한 곳이다. 기차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차며, 기차는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한 기차에 무거운 짐을 들고 타고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인도 기차
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짐을 두고 Gateway of India와 Taj Mahal Palace를 보기 위해 나왔다. 호텔에서 가까운 Belapur CBD역에서 기차로 Chhatrapati Shivaji Terminus(CST)역까지 이동해서 걸어서 목적지까지 걸어갈 계획이었다. 기차표는 2등석이 약 15루피(한화 약 300원), 1등석은 150루피(한화 약 3000원)이었다.

Belapur CBD역으로 가면서 노점상에서 바나나를 40루피에 샀다. 원래 바나나 한송이 가격은 20루피였는데 인도 수박을 어떻게 먹냐고 물어봤더니 노점상 아주머니가 칼로 잘라버려놓구서는 나에게 칼로 잘랐으니 사야한다고 강매하려고 했다. 결국 바나나 값으로 20루피를 더 치루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역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뭄바이의 기차는 가혹했다. 기차는 승객들이 내리고 타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멈추지 않은 기차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고, 출발해 움직이는 기차로 사람들이 몸을 날렸다. 철제 감옥같은 기차안은 더운 열기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11월인데도 낮 기온은 35도 가까이 올랐고 기차 안은 사람들로 비좁았다.



내가 탈 기차가 움직이자 나는 가장 가까운 기차칸으로 올라탔다. 내가 올라탄 칸에는 이상하게도 여자밖에 없었다. 내가 올라타자 기차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 보았다. 할머니 한분이 내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어리둥절하자 중년 여자분 한분이 "lady compartment"라고 영어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음 역에서 다른 칸으로 옮겨타라며 내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가르키며 사진은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뭄바이 기차의 여성전용칸 표시

인도의 기차안에서 승객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선풍기가 전부였다. 완충제라곤 전혀 없는 기차안은 철골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었다. 열고 닫는 문은 항상 열려있었고 기차가 달리는 중에도 닫히지 않았다. 창에는 유리라고는 없이 철근을 용접해서 만든 창살이 전부였다. 기차안에서 나는 세계2차대전때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뭄바이의 기차에는 외국인이 잘 타지 않는지 기차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낯설어 했다. 내가 가진 카메라, 옷차림, 인도사람에 비해 밝은 피부색 등이 신기한지 사람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한 역에선가 마른 새까만 여자아이가 내가 있는 기차칸에 올랐다. 빼곡히 찬 어른들 틈사이를 뚫고 익숙하게 기차위로 날듯이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그리곤 내 팔을 만지려했다. 내 옆에 있던 인도인 연인들이 그러지말라고 여자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중 여자분이 지갑을 열어 아이에게 동전을 주자 아이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그 아이가 구걸하는 아이인지 알아차렸다. 내가 내 가방에 들어있던 바나나를 두어개 뜯어 여자아이에게 주자 그 아이는 생긋이 웃으며 받았다.





기차안에서 나는 뭄바이대학을 졸업하고 맥도날드에서 일 한다는 인도 청년을 만나 CST역까지 잘 갈 수 있었다. 원래 Belapur CBD역에서 CST역까지 바로 연결되는 기차선로가 있지만 그날 선로 유지보수 때문에 여러번 갈아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인도 청년을 따라 열차를 잘 갈아탈 수 있었다.

Chhatrapati Shivaji Terminus(CST)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이 역은 뭄바이에 있는 가장 화려한 고딕양식 건물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 이 역은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거 Victoria Terminus라 불리던 것을 1998년에 Chhatrapati Shivaji Terminu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Christopher London은 무굴제국 통치의 상징이 타지마할이라면 영국 통치의 상징은 Victoria Terminus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건물은 지지대(buttress), 돔, 포탑(turret), 첨탑(spire), 착색 유리창(stained-glass window)에 빅토리아, 힌두, 이슬람 양식이 혼합되어 녹아있다.

이 역은 아시아에서 가장 붐비는 역이라고 한다.

Chhatrapati Shivaji: 인도 최후의 힌두왕조인 마라타(Maratha)왕조의 설립자(1674년)





기차에서 만난 인도청년이 일하는 맥도널드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두시간 가량을 열기로 가득찬 뭄바이 기차에서 보낸 터라 콜라에 든 얼음을 버리기 아까웠다. 얼음이 든 음료컵을 들고 나오자 거리의 한 아이가 나에게 그 컵을 달라며 다가왔다. 맨발에 떡진 머리를 하고 있던 그 아이는 눈빛만은 유난히 초롱초롱한 여자아이였다. 나는 얼마남지 않은 얼음이 든 컵을 아이에게 주고 가방에 든 바나나도 아이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주위의 또래 아이들이 몰려와 바나나를 나누어 먹으면서 나에게 고마워했다.

CST역앞 거리에서 만난 인도아이들

나는 CST역에서 Gateway of India까지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였다. Gateway of India까지 가는 길에는 식민지때 지어진 건물들이 많았다. 이 건물들의 정문 옆에는 건물의 역사와 보존가치를 등급화해서 매겨놓은 기록판이 붙어 있었다.

뭄바이 시내는 과거와 현대, 자연과 인간,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이 모든 것들이 섞여있었다. 이 섞임은 이방인인 나에게 그다지 조화롭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기가 어려울 만큼 차들이 붐볐지만, 거리 한쪽에선 소가 여물 통에 머리를 묻고 있기도 했고 시내 한복판의 현대식 빌딩 숲과 열대의 우거진 수목이 함께 있었다. 커다란 간판을 단 국제적 거대기업의 상점들과 과일을 팔고 있는 나무로된 노점상이 같은 거리에 섞여 있었으며, 화려해 보이는 값비싼 옷을 입은 부유한 사람들과 거리에서 자고 먹는 듯한 가난한 사람들도 같은 거리에 있었다.


뭄바이 대학가 서점



고래 박물관

뭄바이 경찰청

Gateway of India
현무암으로 된 아치형 건물인 이 건물은 19세기 주요 수출항이었던 아폴로 항구의 끝자락에서 뭄바이 항구쪽을 바라보고 있다. 16세기 구자라트(인도 서부 지방)의 이슬람 양식인 이 건물은 1911년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방문을 기념해 지어졌으며, 국왕이 돌아간 한참 뒤인 1924년 완공되었다. 24년 후에 인도가 독립했을 때, 영국의 마지막 연대가 가두행진을 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인도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이 건물 뒤에는 "코끼리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Taj Mahal Palace, Mumbia
이 상징적인 호텔은 동화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슬람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항구를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은 파시교도 기업가인 JN Tata에 의해 1903년에 지어졌다. 타타그룹의 설립자인 그는 당시 유럽호텔에서 묶고자 했으나 인도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하는 일을 겪고 난 후 이 호텔을 세웠다. 2008년 이 호텔은 테러리스트에 의해 점령당해 심한 손상을 입기도 했다.




Gateway of India와 타지마할 호텔을 돌아본 나는 해안가를 따라서 Sasson Dock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걸어가는 길에 인도 아이들이 야구 비슷한 놀이(크리켓)을 많이 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오래 걷자니 목이 많이 말랐다. 거리의 구멍가게에서 콜라를 하나 사서 금방 다 마셨다. Sassoon Dock까지 걸으면서 인도사람들의 일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Sassoon Dock
Sassoon Dock은 뭄바이의 가장 오래된 선창중의 하나다. 그리고 일반에게 공개된 몇 안되는 선창이기도 하고, 가장 큰 어시장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 항구는 1875년 알버트 압둘라 데이비드 사순(Albert Abdullah David Sassoon)이 간척한 땅위에 세워졌고, 사순가족에 소유다.

Sassoon Dock의 허름한 건물들 안에는 어리게는 10살 정도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부터 많게는 60살은 족히되어 보이는 할머니까지 빼곡히 않아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내가 한 건물을 들여다보자 안의 모든 인도 여자들이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하지만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웃던 그 모든 얼굴들이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Sassoon Dock은 목선들로 가득차 있었다. 뭄바이에서는 아직까지도 예전의 방식으로 목선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Sassoon Dock에서 경찰로 보이는 인도인으로 부터 허락을 얻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얼음을 채우고 있는 한 배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얼음을 배에 부어주고 있던 분이 사진을 찍으라면서 친절하게 얼음을 배에 싣는 모습을 나에게 시연해주기도 했다. 인도는 아직까지도 많은 것들이 사람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이, 어른이 없었다.





Sassoon Dock을 한바퀴 돌아본 나는 숙소로 향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걸어온 거리를 걸어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피곤해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churchgate역까지 가기로 했다. 어떤 버스를 타야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마다 대답이 달랐다.



인도 버스에는 제복을 입은 차장이 버스안에서 요금(10루피)를 거두며 승객사이를 다녔다. 처음타 본 인도의 버스안에서 차장의 양해를 얻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Sassoon Dock에서 Churchgate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목이 탔다. 마침 대나무 줄기 같은 것을 짜 즙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거리에서 자주보던 것이어서 무엇인지 맛은 어떤지 궁금해서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제일 큰 컵은 20루피라고 해서 한 컵을 마셔보기로 했다. 맛은 바나나 즙과도 비슷하면서 달고 맛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대나무 같은 것이 사탕수수(Sugar Cane)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붐비는 뭄바이의 철도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넘어있었다. 첫날 나는 피곤한 덕분에 잠을 잘 잘 수 있었다.





둘째날 인도맥주 킹피셔(Kingfisher)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
- 왕오천축국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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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eong Ho

Lee, Jeong Ho
Biography: Bachelor: Computer Science in Korea Univ. Master: Computer Science in KAIST Carrier: 1. Junior Researcher at Korea Telecom (2006 ~ 2010) 2. Researcher at Korea Institute of Nuclear Nonproliferation and Contro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