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의 창건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율사가 7년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별연수사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그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설단 영심, 융종, 불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받는다. 그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고 한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그 법을 받은 영심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이리라 추정된다.
고려 인조때 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법주사의 중창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33년)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 태조 1년(918년)에 왕사인 즉통국사가 중건하였다. 그리고 문종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승통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년)에 벽암각성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 벽암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차례 중창이 거듭되었다. 문종(서기 1046년 ~ 1083년)의 여섯째 왕자였던 도생승통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스님의 형이었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다. 도생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도생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아가 도생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조 때(서기 1122년~1146년) 김부식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 총혜왕 3년(서기 1342년)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 그리고 도생승통비 등이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이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종 때(서기 1259년~1274년)는 자정미수대사(서기 1240년~1324년)가 절에 주석하였다. 자정미수대사는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하여 장의사, 국령사, 대민천사, 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를 92권이나 찬술하였다. 충렬왕 7년(서기 1281년)에는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공민왕 12년(서기 1363년)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법주사
조선 초 세조 때(서기 1455년~1468년)는 신미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의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던 신미스님은 이보다 앞선 세종 31년(서기 1449년)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진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하였으나 정유재란때 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다. 선조 38년(1605년)부터 인조 4년(서기 1626년)에 걸쳐 사명대사 유정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다. 그 뒤 벽암각성스님(서기 1575년~1660)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다. 벽암스님은 임진왜란때 서산대사에 버금가는 분이다. 병자호란을 맞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승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철종 2년(서기 1851년) 3월 영의정 권인돈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룩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당시 주지 장석상 스님이 발원하고 전북 태인에 살던 김수곤이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 완공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태전스님(1869년~1968년)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다. 당시 금오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1976년 주지 탄성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주지 월탄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관을 마련하였다. 1997년 선원과 후원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다.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께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된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았다.
팔상전(국보 제55호)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으로 사찰창건 당시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해지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없어진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서기 1624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저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신라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조성된 것을 추정된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석연지(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제19년(서기 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높이는 1.95m, 둘레 6.65m이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있다. 중앙에 봉안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에 안치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화신으로 나타나신 신 석가모니불상이다.
법주사대웅전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인조 4년(서기 1626년)에 조성되었고, 영조 23년(서기 1747년)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16호)
효종 6년(서기 1655년) 조성되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법주사세존사리탑
높이 3.5m인 이 탑은 공민왕 11년(서기 1362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 사리 한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형식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위에 탑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되어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있다.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율사가 7년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별연수사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그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설단 영심, 융종, 불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받는다. 그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고 한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그 법을 받은 영심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이리라 추정된다.
고려 인조때 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법주사의 중창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33년)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 태조 1년(918년)에 왕사인 즉통국사가 중건하였다. 그리고 문종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승통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년)에 벽암각성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 벽암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차례 중창이 거듭되었다. 문종(서기 1046년 ~ 1083년)의 여섯째 왕자였던 도생승통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스님의 형이었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다. 도생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도생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아가 도생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조 때(서기 1122년~1146년) 김부식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 총혜왕 3년(서기 1342년)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 그리고 도생승통비 등이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이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종 때(서기 1259년~1274년)는 자정미수대사(서기 1240년~1324년)가 절에 주석하였다. 자정미수대사는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하여 장의사, 국령사, 대민천사, 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를 92권이나 찬술하였다. 충렬왕 7년(서기 1281년)에는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공민왕 12년(서기 1363년)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법주사
조선 초 세조 때(서기 1455년~1468년)는 신미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의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던 신미스님은 이보다 앞선 세종 31년(서기 1449년)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진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하였으나 정유재란때 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다. 선조 38년(1605년)부터 인조 4년(서기 1626년)에 걸쳐 사명대사 유정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다. 그 뒤 벽암각성스님(서기 1575년~1660)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다. 벽암스님은 임진왜란때 서산대사에 버금가는 분이다. 병자호란을 맞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승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철종 2년(서기 1851년) 3월 영의정 권인돈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룩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당시 주지 장석상 스님이 발원하고 전북 태인에 살던 김수곤이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 완공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태전스님(1869년~1968년)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다. 당시 금오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1976년 주지 탄성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주지 월탄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관을 마련하였다. 1997년 선원과 후원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다.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께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된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았다.
팔상전(국보 제55호)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으로 사찰창건 당시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해지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없어진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서기 1624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저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신라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조성된 것을 추정된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석연지(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제19년(서기 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높이는 1.95m, 둘레 6.65m이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있다. 중앙에 봉안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에 안치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화신으로 나타나신 신 석가모니불상이다.
법주사대웅전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인조 4년(서기 1626년)에 조성되었고, 영조 23년(서기 1747년)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16호)
효종 6년(서기 1655년) 조성되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법주사세존사리탑
높이 3.5m인 이 탑은 공민왕 11년(서기 1362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 사리 한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형식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위에 탑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되어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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