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욕심을 비우면 마음보다 너른 것이 없고, 탐욕을 채우면 마음보다 좁은 곳이 없다.
염려를 놓으면 마음보다 편한 곳이 없고, 걱정을 붙들면 마음보다 불편한 곳이 없다.
-공지사항: 육아일기 등 가족이야기는 비공개 블로그로 이사했습니다.

2014년 5월 24일 토요일

김제 금산사 - 2014. 5. 25(일)

조선 성종 23년(서기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부처님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에서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금산사 사적"에 의하면 금산사가 백제법왕 1년(서기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때 수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 변산 부사의암에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간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진표율사는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 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의 규모를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경덕왕 21년, 762년 ~ 혜공왕 2년, 766년)

금산사는 진표율사때 부터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화엄경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영원한 진리의 빛 그 자체)를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이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 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이와 지, 중생과 부처,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원래 대웅대광명전이었다. 대웅대광명전으로 불리던 때에는 이곳에 법신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만 봉안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1597년 경내의 모든 전각이 소실된 후 인조 13년(서기 1635년)에 이르러 도량을 재건하였는데,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봉안하고 있던 5여래 6보살을 다시 조상하여 모두 한자리에 봉안하고 현액을 대적광전으로 밖웠다. 1986년 원인모를 화재로 법당이 전소되어 보물 제476호 지정이 해제되었으나, 199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을 봉안하였다. 6대 보살은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대보살을 모신 곳이다. 이는 한국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어야하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이 체득했기 때문이다. 왼쪽 벽에는 1991년 주지 월주스님과 증명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미륵전(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어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66년)에 처음 건립하였다. 법당내에는 미륵불, 법화림보살, 그리고 대묘상보살 등 삼존상이 조상되어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때 전소되었으나 조선 인조 13년(서기 1635년)에 수문대사가 한국 유일의 삼층법당으로 재건한 것이다. 법당 외부 1층과 2층은 정면 5간, 측면 4간이고, 3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인 팔작지붕 다포형식이며 법당내부는 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통층이다. 건물중앙의 제일 높은 기둥은 하나가 아니라 몇개의 기둥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기둥양식은 목조탑 양식에서 번안된 구조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서로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오랜 풍우를 지내는 동안 건물의 목재가 썩고 건물이 기울어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에 걸쳐 문화제관리국 주관으로 건물을 전면해체보수하였으며 1999년에 다시 번와광사를 하였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연대미상의 철제연화대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법당 내부에는 원래 철불이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항간에는 이 연화대가 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솥을 만지는 모든 사람은 속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르침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쫒고 미륵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금산사 미륵전

미륵전에는 높이가 11.8m에 이르는 미륵불을 가운데 모셨고 왼쪽의 범화림 보살과 오른쪽 대묘상 보살을 협시하였다. 조선시대 수문대사가 복원할 때 소조 삼존불로 봉안한 것이 1943년 실화로 일부 소실 되었다.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있다. 오른쪽 벽에는 고종 27년(서기 1890년)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있다.

대장전(보물 제827호)
대장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을 목판에 새긴 경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전각이다. 보통 장경각이라고도 한다. 금산사 대장전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있다. 삼면의 벽에는 10폭의 벽화가 걸려있다.

금산사 대장전은 미륵전을 장엄하는 정중 목조탑으로 미륵전과 함께 일찍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에 소실된 후 조선 인조 13년(서기 1635년)에 재건되었으며 1922년 미륵전 앞에서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지붕위에 남아있는 복발과 보주 등은 조선 인조 이전의 목탑 잔영이며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규모이지만 정중 목탑의 번형 건물로 주목되며 석가모니불 후불광배의 조각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 한다. 조선 철종 8년(서기 1857년)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재건한 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금산사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인 지장보살,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지장삼존의 좌우에는 시왕상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머리에 금강경을 이고 있는 분은 염라대왕이다.

원통전
관음보살이 "주원융통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고 해서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원통전이라고 한다. 관음전, 대비전(관음보살이 대자대비하신 분이기 때문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적멸보궁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이 법당의 바깥이나 뒤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했거나 계단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금산사 적멸보궁은 방등계단에 참배하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된 방등계단 예배전이다. 원래는 나한전으로 석가모니불, 제화가라보살, 미륵보살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었으나, 1998년 방등계단을 성역화할 때 다시 크게 개축한 것이다. 이 법당 뒤에 있는 방등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당내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았으며, 그 기능이 부처님 진신사리 예배소이기 때문에 이름을 적멸보궁으로 바꾸었다.

금산사 적멸보궁

방등계단
수계법회를 거행할때 숙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와 칠증이 둘러앉아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는 양산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 삼사칠증: 구족계를 줄 때에 계화상, 갈마사, 교수사의 스승 세명과 증인으로 모신 7명을 통틀어 이르는 말
* 구족계: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348계가 있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 정, 혜 삼학 가운데 계를 으뜸으로 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 계단의 중앙에는 보물 제26호인 석종형 부도가 있다.

조선시대 김시습(1435~1493)이 이 절을 찾아 방등계단에 시 한편을 남겼다고 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금산사)를 밝히는데
밤중에는 바람과 우레가 석단(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엔 이끼가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름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방등계단 사리탑(보물 제26호)
방형의 상하 이중기단을 구비한 높이 2.57m의 석종형의 부처님 진신 사라탑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간석으로 되어있고 상하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있고 하층기단 이면에는 난간을 돌렸던 흔적이 있다. 또한 석주에는 기이한 인물상이 새겨져 있으며 석난간 네 귀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탑신을 받치고 있는 판석 네 귀에는 사자의 머리만을 부각시켜 조상하였다. 탑신 받침 부분 주위에는 연관을 둘리고 있고 밑바닥의 평면은 범종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특히 밑 부분에는 범종의 하대와 같이 화문대를 조각하였다. 정상에는 9룡이 전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보주석을 올려 놓고 있다. 이와같은 석종형의 사리탑은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인도의 불탑 형식에서 연유된 것이다.

오층석탑(보물 제25호)
금산사 오층석탑은 보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석탑은 높이가 7.2m로 기록에 따르면 9층이었다고 한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된다.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나 경전을 봉안하여 법당 앞 중앙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금산사 오층석탑은 방등계단을 장엄하는 정중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중기단 위에 높이 7.2m의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어 방등계단을 더욱 성스럽게 장엄하고 있다.

탑의 구조는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협소하고 옥개석 추녀 끝이 살짝 들려 고려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상륜부의 노반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복발이 있고 복발위에 보륜과 보주가 설치되어 있다.

1971년 해체 복원하였는데 과거부처님인 정광여래사리 2과와 석가모니불 사리 5과가 나와 복원과 동시에 다시 봉안하였으며 금동여래 8분 등 다른 유물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은 고려초의 석탑으로 봉천원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높이는 2.18m이며 11층 탑으로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인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의 육각다층석탑이다. 이색적인 각 층의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이 두드러진다. 원래 이 탑은 각 층마다 탑신이 있었으며 육각의 모서리마다 풍경이 달려 장엄스러웠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층의 탑신과 11개층의 옥개석만 남아있다.


석련대
보물 제23호인 금산사 석련대는 높이 1.67m, 둘레가 10.3m인 유례가 찾아보기 힘든 대형 연화대좌로서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이 뛰어나다. 원래 이름은 석조연화대이다.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한 불상의 좌대로 무려 높이가 1.52m, 둘레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연화대 전체가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나 어러개의 돌로 만들어진 것처럼 상, 중, 하의 3단 양식을 정연히 갖추고 있다. 하대석의 측면은 10각형이며 8개의 면에는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 서화를 조각하였으며 2개 면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복련판을 각면에 따라 10판을 돌려 웅려하게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조각과 장식 이외에도 중대, 상대, 등에는 안상과 화문, 연판문 등을 장식적으로 의장법응로 조각하였다. 상대석 윗면 중앙부분에는 두 개의 방형 구명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 좌대가 석불 입상을 세우는데 이용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좌대의 조각 수법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과 유사하나 무질서한 안상의 배치와 연판내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초기 대략 10세기경의 석조물로 추정하고 있다.

노주(보물 제22호)
노주란 노반지주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고 광명대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룩불에서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만약 이말이 맞다고 한다면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석조 건조물은 그 용도를 알수 없는 유물이나 그 형태가 방형의 연화대처럼 조성된 특이한 석조물임에 착안하여 노주라고 부르고 있다.

석조 건조물의 구조는 상, 중, 하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마다 안상과 화형문 그리고 귀기와 앙련, 복련 등이 화려하고 다양하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상대석 위에는 일반 석탑의 상륜부와 유사한 향식이 조각되어있는데, 상륜부가 원형이며 보주 사익는 간주 형식인 것이 매우 특이하다. 영봉형인 보주의 조상 기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등(보물 제828호)
법당 앞을 밝히는 등불로 인등, 장명등이라고 한다. 이 석등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3.9m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1922년 대장전을 이전할 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하여 하대는 원형인데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간석은 팔각형이며 각 모서리마다 선을 쳐서 우주인 듯이 강조하였다. 상대는 앙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과 개석은 팔각형이며 개석 정상에는 원대를 두어 상륜부를 반들게 하였다.

대장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석등으로 보물 제828호로 지정되어있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 연화석, 화사석,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어있다.


나한전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 응공, 응진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이 전각에는 사성제를 깊이 깨달아 일체의 무명과 애착을 여의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에 이른 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5백 나한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한을 모신 응진전으로 구별된다.

금산사 나한전은 원래 적멸보궁 자리에 있었는데, 1996년 방등계단을 성역화할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새로 지었다. 전각 내에는 옮기기 이전의 나한전에 봉안되어있던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가라보살 그리고 16나한상이 조상되어있고, 1986년 대적광전 화재때 전소된 오백나한상은 1996년에 새롭게 조상하여 봉안하였다.

금산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제자 가운데 으뜸인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고 있다.

보제루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라고 한다. 잦은 외침에 승벽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서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 강설,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 날에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다.

당간지주(보물 제28호)
당간지주는 사찰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괘불을 세울 때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높이가 3.5m이며 양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서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다. 양 지주에 각면에 장식된 조각기법이 현저하게 두드러지며 우리나라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당간지주

범종각
범종각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범종은 지옥에서 안갖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율법을 들려주기 위하여 하루 중 인시, 오시, 술시 등 모두 세번 친다. 장엄하게 울리는 범종 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 중생들은 누대 겁에 걸쳐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을 깊이 뉘우치고, 청정하고 순결한 본래 자신의 마음으로 보리심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몸은 비록 지옥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보리심을 발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옥에 머무르지 않고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법고는 축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범종 다음으로 친다. 북을 치면서 대군이 진군하는 것과 같이 법고 소리를 들으면서 축생과 수행자들은 모든 사바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그리고 운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법고 다음으로 차례로 친다. 목어는 간략히 목탁으로 만들어 법당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목어와 목탁을 치는데는 물고기가 언제나 눈을 뜨고 있듯이 수행자들에게 방일하지 말고 대승의 행원을 다하는 날까지 용맹스럽게 정진하라는 경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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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eong Ho

Lee, Jeong Ho
Biography: Bachelor: Computer Science in Korea Univ. Master: Computer Science in KAIST Carrier: 1. Junior Researcher at Korea Telecom (2006 ~ 2010) 2. Researcher at Korea Institute of Nuclear Nonproliferation and Contro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