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욕심을 비우면 마음보다 너른 것이 없고, 탐욕을 채우면 마음보다 좁은 곳이 없다.
염려를 놓으면 마음보다 편한 곳이 없고, 걱정을 붙들면 마음보다 불편한 곳이 없다.
-공지사항: 육아일기 등 가족이야기는 비공개 블로그로 이사했습니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다 - 2012. 12. 2(일) ~ 12. 8(토)

파리를 처음 가본 나의 느낌은 "참 부럽다"였다. 파리라는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뛰어난 아름다움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전통성이 정말 부러웠다.

첫째날, 2012년 12월 2일(일)
2012년 12월 2일(일) 저녁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에 지친 나는 얼른 숙소에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얼핏 본 파리의 야경은 오랜 비행으로 인한 피곤함을 잊게 해줄 만큼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이는 에텔탑은 반짝반짝 색을 달리하고 있었고, 거리에 언듯언듯 보이는 건물들은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인 것럼 멋있어 보였다.

내가 묵은 숙소는 파리 외곽의 Saint-Emiilon역 근처의 Kyriad 호텔이란 곳이었다. 이곳은 좀 저렴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99유로(약 14만원)나 했다. 그럼에도 방은 침대와 벽이 거의 붙어있을 만큼 좁았다. 좋은 점은 숙박비에 아침 부페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Saint-Emillion 지하철역과 매우 가깝다는 점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언제나 처럼 다음날을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를 제외한 동료들은 파리에서의 첫날을 축하하기 위하여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파리에서의 숙소 위치

숙소 정문

숙소 거리

숙소의 부페 식당

둘째날, 2012년 12월 3일(월)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든 나는 설렘과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시간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에펠탑을 서둘러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밖에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 중에 자유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정을 위해 호텔 로비에서 오전 11시에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아침 일찍 다녀오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침을 먹으면서 내 계획을 들은 일행 중 두명이 동행하기로 했다. 나는 원래 에펠탑을 걸어서 올라가려 했으나, 날씨도 날씨이거니와 같이가는 동료도 생기고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파리의 지하철
에펠탑을 가기 위해 처음으로 파리의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경로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14호선 Cour St-Emiilon역에서 14호선과 RER C 환승역인 Bibliotheque Fr. Mitterrand역에서 RER C로 갈아타고 RER C의 Champde Mars Tour Eiffel역에서 내리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처음 시도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쉽지 않다. 처음 파리의 지하철 타는 것도 그랬다. 파리 지하철 요금체계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파리 지하철은 6개 Zone, 14개의 Metro 노선, 5개의 RER(Reseau Express Regional, 광역철도)가 있었다. 그리고, 티켓의 5종류도 여러가지가 있었다. (아래 표는 파리에서 돌아와서 따로 조사한 것으로 2012년 1월 기준, 자세한 내용은http://www.ratp.fr/ 참조)

구분1~2 Zone
(파리시내)
1~3 Zone
(파리주변)
1~4 Zone
(베르샤유 등)
1~6 Zone
(공항까지)
비고
Billet
(비에)
1.7유로3.20유로6.30유로1회권
Carnet
(까르네)
12.70유로25.60유로50.40 유로10회권
Mobilis
(모빌리스)
6.40유로8.55유로10.55유로14.20 유로1일권
Paris Visite1일권: 9.75유로
2일권:15.85유로
3일권:21.60유로
5일권:31.15유로
1일권:20.50유로
2일권:31.15유로
3일권:43.65유로
5일권:53.40유로


파리 지하철 노선도(Zone별)

파리의 지하철 노선도

지하철표: Billet

지하철표: Mobilis

출근하는 파리 시민들과 경쟁하면서 자동판매기 앞에서 줄을 섰다가 어떤 표를 사야할지 몰라 안내데스크에서 질문을 하기를 여러번 반복해가며, 겨우 우리는 Paris Visite 1일권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날 결국 우리는 Paris Vistie를 다 활용하지 못했다. Billet을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

14호선 Cour St-Emillion역에서 지하철을 타면서도 반대방향으로 타 다시 내려 반대방향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RER C에서 우리가 타야할 목적지로 가는 기차를 어떤 플랫폼에서 타는지 몰라서 헤매기도 했다.

파리의 Metro

파리의 Metro 내부

파리의 RER(Reseau Express Regional, 광역철도)

파리의 RER 내부

에펠탑(Eiffel Tower)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결국 우리는 Champ de Mars Tour Eiffel역에 무사히 내렸다. 역에서 나오자 마자 우뚝 솟아있는 에펠탑을 보자 마자 우리는 사진부터 찍었다.




에펠탑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표를 사는 1층, 식당 및 기념품점 등이 있는 2층, 맨꼭대기 3층의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펠탑은 1층에서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갔다. (물론 걸어서도 올라갈 수 있다.) 1층에서 2층까지 엘리베이터는 에펠탑의 다리를 따라 올라가며 2층에서 꼭대기 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는 에펠탑의 정중앙을 따라 올라갔다. 우리가 올라간 날은 날씨가 궂어 2층에서는 파리 전경이 좀 보였으나 꼭대기 층은 구름에 가려 아래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에펠탑의 구조

에펠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리 시내는 참 놀라웠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주위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파리 시내는 재개발이 엄격히 제한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시내에는 고층빌딩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라데팡스 지역만 고층빌딩의 건축이 허용되어있다고 했다.) 그러한 제한 때문인지 파리는 지은지 200년이 넘은 건축물들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고, 파리는 고풍스러운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에펠탑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상업적 개발로 역사적 전통을 지키지 못한 우리나라의 서울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멀리 보이는 라데팡스 지역의 고층빌딩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세느강

에펠탑 2층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


에펠탑의 엘리베이터(1층에서 2층까지 이동)

에펠탑의 꼭대기 층 (방향별로 여러나라의 수도가 표시되어있음)

에펠탑 방문을 서둘러 마친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11시에 숙소 로비에서 모여서 함께 점심을 먹고 공식일정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숙소 근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점심을 먹으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식사를 천천히 하는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과 비슷한 시기에 식사를 시작한 프랑스인을 나는 유심히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식사를 다하고 식당을 떠날 때까지도 음식의 절반도 채 먹지 않고 있었다.

숙소 근처 중국음식점

프랑스에서 만 하루를 보내 보니 프랑스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겨울과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놀란 것은 12월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들판이 아직 푸르다는 사실이었다. 파리의 겨울 기온은 -4도에서 2도 사이로 쌀쌀했지만 우리나라의 겨울에 비하면 그리 추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파리는 위도가 북위 48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특히나 그랬다. (우리나라 신의주 위도가 북위 40도 정도라고 한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한데, 우리나라의 북서쪽은 대륙이 있고, 프랑스는 북서쪽에 바다가 있어서 프랑스의 겨울은 우리나라에 비해 혹독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시차도 적은 되지 않은 데다가 아침 일찍부터 궂은 날씨에 에펠탑도 다녀온 덕에 노곤한 하루를 보냈다.

셋째날, 2012년 12월 4일(화)
파리는 밤부터 아침까지 비가 오고 낮에는 게었다. 프랑스에서 셋째날은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샹젤리제 거리를 들렀다. 콩코드 광장에서 시작해서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드골광장의 개선문까지 약 2km 정도를 걸었다.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콩코드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중앙에는 만든지 3,300년이나 된 이집트의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Obelisk, 방첩탑)이 있기도 했다. 이 오벨리시크는 원래 이집트의 테베(현재의 룩스르)의 람세스 사원에 있던 것으로 1831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에 의해 프랑스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이 광장에서는 프랑스 혁명시절 1,300여명의 사람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93년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처형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콩코드 광장의 룩소르 오벨리스크(멀리 에펠탑이 보임)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Elysees)
오래 전부터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라는 샹송 가사(피에로 드라노에의 Aux-Champs-Elysees)로 익숙한 거리였다. 샹젤리제라는 이름은 엘리시온 들판(Elysian Field)에서 따온 것으로 이 들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복한 영혼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믿던 곳이라고 한다.

샹젤리제 거리(wikipedia 에서)

샹젤리제 거리에는 많은 상점이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프랑스에서 선물로 스카프를 사달라고 했는데, 마침 샹젤리제 거리에 스카프 점이 있어 아내 선물을 샀다. 샹젤리제 거리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올리브유와 햄 그리고, 치즈를 파는 식료품점도 있길래 여기서 치즈도 한덩이 샀다.
샹젤리제 거리

샹젤리제 거리의 스카프 상점

샹젤리제 거리의 식료품점

평일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샹젤리제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관광객이리라. 이 사람들을 위해서 샹젤리제 거리 하늘 위를 산타가 썰매를 타고 나르는 이벤트도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난 산타

샹젤리제 거리의 횡단보도가 있는 중앙선 부근은 관광객들을 위한 일종의 포토존이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할 정도였다.

샹젤리제 거리

샹젤리제 거리의 포토존

개선문(Arc de Triomphe)
샹젤리제 거리의 맞음편 끝은 드골광장에 우람하게 서있는 개선문이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아오스테를레츠(Austerliz) 전투(1805년)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당시 프랑스군의 전략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눈부신 성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10년도 되지 않아 나폴레옹은 권력을 잃었고, 그의 제국은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문의 건설은 중단되지 않았다. 개선문은 프랑스 왕정이 복구된 후 건설이 중단을 반복하다 1836년에서야 완성된다. 나폴레옹군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 개선문을 통과해보지 못한다. 오히려, 1840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의 유해만 폐병원(Invalides, 현재 센느강 강변의 군사박물관, 나폴레옹1세를 비롯한 많은 군인의 묘가 있음)으로 옮겨지는 길에 개선문을 통과한다.




개선문의 바닥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130만명의 프랑스 군인을 기리기 위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1921년). 그리고, 프랑스 역사상 주요한 사건을 기리기 위한 명판도 있는데 프랑스 제3공화정의 선포(1870년 9월 4일), 알사스(Alsace)와 로렌(Lorraine) 지방의 프랑스령으로 반환(1918년 11월 11일) 등의 사건에 대한 명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드골이 영국 망명시절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독려하기 위하여 프랑스어로 방송했던 것을 기리기 위한 청동 명판이다 (1940년 6월 20일).

드골의 런던 방송을 기리기 위한 청동 명판 (인터넷에서)

개선문은 4개의 주 조각, 6개의 부조와 윗부분을 따라 조각한 프리즈로 장식되어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조각가에 의해 조각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주 조각이다. 이 조각의 이름은 라마르셰예즈(La Marseillaise)로 승리의 여신의 날개 아래 모인 프랑스 군인들을 조각한 것으로, 이들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침입군을 물리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6개의 부조는 프랑스혁명군과 제정 프랑스군의 주요 전승을 조각한 것이며, 프리즈는 프랑스군의 출전과 귀환을 나타내고 있다.


라마르셰예즈

개선문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지하철 입구 앞에 왠 프랑스인이 "강남스타일"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며 구걸(?)을 하고 있어 신기해하며 구경을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일행들과 함께 숙소근처 맥주 집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넷째날, 2012년 12월 5일(수)
넷째날은 일정이 약간 일찍 끝났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렀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de Notre Dame de Paris)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Our Lady란 뜻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성당이다. 원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던 자리에는 갈로 로만(Gallo-Roman)시대의 사원이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 짓기 시작하여 14세기 초반에 완성되었다. 프랑스 혁명때 많이 훼손되어 1845년에서 1864년까지 복구가 이루어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인터넷)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양식의 기본에 충실하게 건축되었으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비대칭적 요소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잡한 균형미로 유명하다. 이러한 점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세개의 주 입구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 입구의 조각상들은 밝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이는 문맹인 사람들도 구약성서의 내용(요한복음과 성도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세 입구의 이름은 오른쪽에서 부터 Portal of the Virgin, Portal of the Last Judgement, Portal of St-Anne 이다. Portal of St-Anne에서 들어가서 Portal of the Virgin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 요한복음: The Passion of the Christ, 성도전: The Lives of the Saints

노트르담 입구

노트르담 대성당의 내부는 길이 130m, 너비 48m, 높이 35m로 약 6,000여명의 기도인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노트르담 내부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인터넷)

노트르담 대성당의 제단(인터넷)

노트르담 대성당의 내부에서 가장 장관인 것은 장미꽃 무늬창(Rose Windows)들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파이프가 7,800개나 되는 오르간 위의 지름이 10m나 되는 서쪽 창과 13세기 이후 보존된 북쪽 창이다. 아쉽게도 내가 갔을 때 이 창들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보지 못했다.

서쪽 장미꽃 무늬창(인터넷)

북쪽 장미꽃 무늬창(인터넷)

노트르담 대성당 남동쪽 익랑(transept)의 보물 박물관(Treasury)에는 미술품, 예배식에 사용되던 물건, 성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때 머리에 썼던 가시면류관(Ste-Couronne, Holy Crown이란 뜻)이 있다. 아쉽게도 나는 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수의 가시면류관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가대석 주변 벽면에는 요한복음을 표현한 목재 조각상들이 있다. 이 조각상들은 1449년 부터 파리의 금세공인들이 매년 5월 1일 대성당에 선물로 기증하던 것들이다. 이러한 금세공인들의 기증은 수십년동안 계속되었는데 5월에 기증되었기에 "May"로 불려진다.

May 중 하나

닷새, 2012년 12월 6일(목)
프랑스에서의 공식일정 마지막날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낭만적이게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공식일정은 센느강 유람선상에서의 만찬이었기에 그때까지 시간 여유가 조금 있었다. 만찬장에는 장장을 입어야했기에 숙소에서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행 두명과 함께 관광객이 되어 베르사유를 가보기로 했다.

베르사유는 파리 외곽에 있는 인구 약 8만여명의 마을로 파리시내에서 광역철도망으로(C 라인)으로 연결되어있다. C 라인의 Versailles-Rive Gauche역에서 내려서 많은 관광객들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베르사유(Versailles) 궁
700개나 되는 방들의 지붕만 3만3천평이 넘고 2153개나 되는 창문이 있으며, 계단만도 67개나 되는 베르사유 궁은 그 규모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작은 문고리 장식까지도 1급 예술품이라는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그 하나하나 전부 감상거리였기 때문에 무엇을 감상해야할지 모를 정도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4세가 그의 아버지 루이13세의 사냥터에 있던 산장을 궁전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이 궁전은 1682년부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로서 프랑스 국왕이 머무는 궁전이었다.

루이14세는 완벽한 궁전건물과 드넓은 정원과 연못을 짓기 위하여 사냥터의 언덕들을 평평하게 만들고 습지를 메우고 숲을 베어내는 대역사를 추진했다. 이 공사는 1661년에 시작되어 루이14세가 세상을 떠나는 1715년까지 계속되었다. 루이15세와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거실들을 추가했다. 1837년 루이-필립 국왕은 베르사유 궁전을 "프랑스의 모든 영광"에 바치는 박물관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 베르사유 궁의 역사에 대한 영상(유투브): http://www.youtube.com/watch?v=O8MaDMxzMfU

270만평이 넘는(900헥타아르)에 달하는 방대한 베르사유 궁은 크게 네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550m 길이의 궁전, 궁전 서쪽에 있는 정원과 운하와 연못, 그랜드 트리아농(Grand Trianon)과 쁘띠 트리아농(Petit Trianon), 마지막으로 여왕의 영국식 마을(Hameau de la Reine)이 그것이다.

베르사유 궁전 입구

베르사유 궁전은 세상에 이렇게 화려한 곳이 또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정말 사람들이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베르사유 궁전을 돌아보면 수많은 화려한 방들이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가구가 거의 없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 베르사유 궁전으로 난입한 사람들에 의해 소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넓은 베르사유 궁에서 겪은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궁의 규모와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에 비해 화장실의 수가 극도로 적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당시 이렇게 화려하고 완벽한 곳에 불결한 화장실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궁전에 살았단 수천여명의 사람들은 화장실이 부족해 정원 여기저기에 볼일을 볼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밟지 않기 위하여 굽이 높은 구두가 발명될 정도였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 (Hall of Mirror, 연회장)

베르사유 궁의 정원은 광대했다. 나는 라톤의 샘(Bassin de Laton)에서 아폴론의 샘(Bassin de Apollon)까지 녹색 융단(Tapis Vert)이라 불리우는 길을 따라 걸어 가서는 샛길로 그랜드 트리아농(Grand Trianon)과 쁘띠 트리아농(Petit Trianon)으로 갔다. 여왕의 영국식 마을(Hameau de la Reine)은 힘들어 도저히 가보지 못하고 마리앙뚜아네뜨 영지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돌아왔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오면 가장 처음 만나는 분수는 라톤의 샘(Bassin de Latone)이다. 이 샘은 오비디우스(Ovid)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메타포르모세스)에서 영감을 얻어서 조각한 조각상이 있다. 정중앙에는 라토나 여신과 그녀의 두 아이인 아폴로와 아르테미스가 있고 그 주위에는 그녀들이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모욕한 리키아인 농부들이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 개구리와 거북이 등 파충류로 변해가고 있다.

* 라토나(Laton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밤의 여신으로 제우스(Zeus)와 아들 아폴로(Apollo, 태양의 신)와 딸 아르테미스(Artemis, 사냥의 여신)를 낳았다. 
* 일부 문헌에서는 농부들을 파충류로 변화시킨 것이 주피터라고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로마 신화의 주피터와 같기 때문이다.
라톤의 샘(Bassin de Latone)

녹색 융단(Tapis Vert)길 끝에는 아폴론의 샘이 있는데, 여기에는 해양의 신인 트리톤(Triton)과 돌고래에 둘러쌓여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탄 태양의 신 아폴로가 궁전을 향해 수면을 솟아오르고 있는 조각이 있다.

아폴론의 샘(Bassin de Apollon)

이렇게 베르사유 궁에 라톤의 샘과 아폴로의 샘에 태양의 신 아폴로에 대한 조각상이 있는 이유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한 루이14세가 스스로를 태양으로 신격화했기 때문인데, 이는 루이14세의 상징을 보면 잘 나타나있다. ("짐이 곧 국가다"란 유명한 말을 남긴 루이14세는 태양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루이14세 상징


마리앙뚜아네뜨 영지

베르사유 궁전을 다니는 기차

센느강의 유람선
낭만적이게도 파리의 마지막 공식일정은 센느강 유람선 만찬이었다.








엿새, 2012년 12월 7일(금)
루브르 박물관(Le Musee de Louvre)

루브르박물관

나폴레옹 대관식

밀로의 비너스

함무라비 법전

댓글 없음:

Lee, Jeong Ho

Lee, Jeong Ho
Biography: Bachelor: Computer Science in Korea Univ. Master: Computer Science in KAIST Carrier: 1. Junior Researcher at Korea Telecom (2006 ~ 2010) 2. Researcher at Korea Institute of Nuclear Nonproliferation and Contro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