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는 성 베드로(The repentant St. Peter), 1820-24, 프란시스코 호데 데 고야
한 노인이 바위 옆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하고 있다. 이 노인은 마치 하늘을 향해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노인의 옆에 놓인 열쇠는 이 노인이 예수의 제자 성 베드로임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이다. (성 베드로는 천국문의 수호자이다.)
이 그림은 고야가 성서를 참고하여 바위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성 베드로를 그린 것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체포되어 대사제 가야파의 집에서 심문을 받자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드러나 처벌을 받을까봐 세 번이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닭이 세 번 우는 것을 목격하고 그리스도의 예언 중의 하나가 적중했다는 것을 깨닳은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약속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이후 회개한 그는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죽음을 당했지만 그 죽음을 달게 받아 그리스도교의 주도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스페인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이 그림처럼 인간의 나약함과 어두운 면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repentant-st-peter/-gEcs4kLjNE4uA?projectId=art-project
봉기(The uprising), 1848이후, 오노레 도미애
이 그림은 거리에서의 혁명적인 대소동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에 대한 민중 봉기를 그린 듯 하다.
이 그림의 핵심은 가운데 빛을 받은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의 저항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있는 자세이다. 이것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1830년에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루브르 소장)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웅적 인물 대신 천 모자를 쓴 노동자, 중절모를 쓴 브루주아, 노동자 계층의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군중이 밀려오는 것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루부르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이 소장하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도미애는 감정과 자세를 빠르게 스케치하는 재능을 이용하여 만화가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루이 필립 정권 아래의 프랑스 사회를 풍자하는 정치적 캐리커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묘사로 많이 알려졌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uprising-l-emeute/TQFsa9LZCe-BIw?projectId=art-project
스트레칭하는 무용수들(Dancers at the Barre), 1900, 에드가 드가
이 작품은 드가가 사망했을 당시 작업실에 남아있던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는 화가의 서명조차 없다. 드가는 1870년대 중반부터 발레 연습용 바에 다리를 올리고 있는 발레리나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작품은 그런 작품들 중 후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두 명의 발레리나는 서로 반대쪽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각자 한쪽 다리를 스트레칭하고 있다. 이 둘이 입은 푸른색 드레스는 하나로 합쳐지며 주황색 배경과 강열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두 발레리나의 연습용 바에 올려진 두 발은 화면 바깥으로 잘려나갔으며 자유로운 선처리는 이 작품이 마치 스냅사진인 것같은 느낌을 준다.
에드가 드가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데 능숙했다. 그는 최초 인상주의 전시의 주역이었지만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풍경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라는 평을 싫어했다. 드가는 여성의 사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으로의 여성보다는 그림의 소재로서 여성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여자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스냅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구도를 즐겨 그렸다. 그래서 선을 강조하는 신체예술인 발레는 드가와 같은 미술가에게는 완벽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는 리허설 홀이나 대기실과 같은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연습하거나 쉬고 있는 무용수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dancers-at-the-barre/5QHNn00OTA2mXw?projectId=art-project
베퇴이유로 가는 길(The Road to Vetheuil), 1879, 클로드 모네
이 작품에서 모네는 다양한 색상의 붓터치와 간단한 구성으로 베퇴이유로 가는 길을 묘사했다. 모네는 이 장소의 다른 계절과 시간을 5점 그렸다.
매 순간 변화하며 생성되는 현실의 인상을 포착한 인상주의 화가 모네는 새로운 작업의 영감을 얻기 위해 옛 거장들의 작품은 보지도 않았다. 모네는 많은 야외 풍경들을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물 위에서 비치는 빛의 효과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빛을 좋아한 그는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
인상주의 화풍이 생겨난 이유 중의 하나는 카메라의 발명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에 대한 정밀한 묘사보다도 흑백카메라가 절대 이룰 수 없는 빛의 묘사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road-to-v%C3%A9theuil/7wHPKlnfBc-apA?projectId=art-project
자화상(Self-Portrait), 1878~80년 사이, 폴 세잔
폴 세잔은 스무점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 이유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까다로운 화가였던 폴 세잔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모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self-portrait/kgFrANAtE-1nZg?projectId=art-project
오베르의 집(House at Auvers), 1890,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은 반 고흐가 37살로 자살한 1890년, 죽기 몇 주전에 파리 북쪽 오베르에서 그린 풍경화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평소 좋아하던 노란색, 녹색, 검은색의 거친 붓터치로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표현했다.
네델런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그가 머물렀던 장소를 기점으로 네덜란드, 파리, 아를르, 생 레미, 오베르 시기로 나뉜다. 그는 생의 마지막 70여일을 오베르에 살면서 77점의 유화와 30점의 드로잉을 그렸다고 한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언젠가 자신의 그림이 물감 값보다 비싸질 때가 올 것이라는 내용도 담겨있다고 한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house-at-auvers/RwFvYmUb77JK5g?projectId=art-project
한 노인이 바위 옆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하고 있다. 이 노인은 마치 하늘을 향해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노인의 옆에 놓인 열쇠는 이 노인이 예수의 제자 성 베드로임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이다. (성 베드로는 천국문의 수호자이다.)
이 그림은 고야가 성서를 참고하여 바위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성 베드로를 그린 것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체포되어 대사제 가야파의 집에서 심문을 받자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드러나 처벌을 받을까봐 세 번이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닭이 세 번 우는 것을 목격하고 그리스도의 예언 중의 하나가 적중했다는 것을 깨닳은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약속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이후 회개한 그는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죽음을 당했지만 그 죽음을 달게 받아 그리스도교의 주도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스페인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이 그림처럼 인간의 나약함과 어두운 면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repentant-st-peter/-gEcs4kLjNE4uA?projectId=art-project
봉기(The uprising), 1848이후, 오노레 도미애
이 그림은 거리에서의 혁명적인 대소동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에 대한 민중 봉기를 그린 듯 하다.
이 그림의 핵심은 가운데 빛을 받은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의 저항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있는 자세이다. 이것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1830년에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루브르 소장)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웅적 인물 대신 천 모자를 쓴 노동자, 중절모를 쓴 브루주아, 노동자 계층의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군중이 밀려오는 것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루부르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이 소장하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도미애는 감정과 자세를 빠르게 스케치하는 재능을 이용하여 만화가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루이 필립 정권 아래의 프랑스 사회를 풍자하는 정치적 캐리커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묘사로 많이 알려졌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uprising-l-emeute/TQFsa9LZCe-BIw?projectId=art-project
스트레칭하는 무용수들(Dancers at the Barre), 1900, 에드가 드가
이 작품은 드가가 사망했을 당시 작업실에 남아있던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는 화가의 서명조차 없다. 드가는 1870년대 중반부터 발레 연습용 바에 다리를 올리고 있는 발레리나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작품은 그런 작품들 중 후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두 명의 발레리나는 서로 반대쪽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각자 한쪽 다리를 스트레칭하고 있다. 이 둘이 입은 푸른색 드레스는 하나로 합쳐지며 주황색 배경과 강열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두 발레리나의 연습용 바에 올려진 두 발은 화면 바깥으로 잘려나갔으며 자유로운 선처리는 이 작품이 마치 스냅사진인 것같은 느낌을 준다.
에드가 드가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데 능숙했다. 그는 최초 인상주의 전시의 주역이었지만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풍경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라는 평을 싫어했다. 드가는 여성의 사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으로의 여성보다는 그림의 소재로서 여성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여자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스냅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구도를 즐겨 그렸다. 그래서 선을 강조하는 신체예술인 발레는 드가와 같은 미술가에게는 완벽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는 리허설 홀이나 대기실과 같은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연습하거나 쉬고 있는 무용수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구글아트: http://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dancers-at-the-barre/5QHNn00OTA2mXw?projectId=art-project
베퇴이유로 가는 길(The Road to Vetheuil), 1879, 클로드 모네
이 작품에서 모네는 다양한 색상의 붓터치와 간단한 구성으로 베퇴이유로 가는 길을 묘사했다. 모네는 이 장소의 다른 계절과 시간을 5점 그렸다.
매 순간 변화하며 생성되는 현실의 인상을 포착한 인상주의 화가 모네는 새로운 작업의 영감을 얻기 위해 옛 거장들의 작품은 보지도 않았다. 모네는 많은 야외 풍경들을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물 위에서 비치는 빛의 효과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빛을 좋아한 그는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
인상주의 화풍이 생겨난 이유 중의 하나는 카메라의 발명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에 대한 정밀한 묘사보다도 흑백카메라가 절대 이룰 수 없는 빛의 묘사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road-to-v%C3%A9theuil/7wHPKlnfBc-apA?projectId=art-project
자화상(Self-Portrait), 1878~80년 사이, 폴 세잔
폴 세잔은 스무점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 이유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까다로운 화가였던 폴 세잔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모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self-portrait/kgFrANAtE-1nZg?projectId=art-project
오베르의 집(House at Auvers), 1890,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은 반 고흐가 37살로 자살한 1890년, 죽기 몇 주전에 파리 북쪽 오베르에서 그린 풍경화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평소 좋아하던 노란색, 녹색, 검은색의 거친 붓터치로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표현했다.
네델런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그가 머물렀던 장소를 기점으로 네덜란드, 파리, 아를르, 생 레미, 오베르 시기로 나뉜다. 그는 생의 마지막 70여일을 오베르에 살면서 77점의 유화와 30점의 드로잉을 그렸다고 한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언젠가 자신의 그림이 물감 값보다 비싸질 때가 올 것이라는 내용도 담겨있다고 한다.
구글아트: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house-at-auvers/RwFvYmUb77JK5g?projectId=art-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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