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욕심을 비우면 마음보다 너른 것이 없고, 탐욕을 채우면 마음보다 좁은 곳이 없다.
염려를 놓으면 마음보다 편한 곳이 없고, 걱정을 붙들면 마음보다 불편한 곳이 없다.
-공지사항: 육아일기 등 가족이야기는 비공개 블로그로 이사했습니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경허선사 (1849-1912) - 퍼온 글(http://bit.ly/9TPcIi)

원효스님이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경허스님은 서산대사 이래로 근대불교에 서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의 기진맥진 쓰러졌던 조선불교의 끝자락에서 다시 화톳불을 켜신 분입니다. '제2의 원효', '길 위의 큰 스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스님의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스님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습니다. 14세때 절에 머문 거사로부터 문맹을 거두었고,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 등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동학사에서 강백이 되어 전국에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자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였들었습니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습니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서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습니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습니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습니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습니다.

'원효의 파계, 진묵의 곡차'이래 최대의 파격적 만행으로 숱한 무애행(無碍行)으로 범부들을 교화한 이적(異積)에 대해 훝날 그의 제자 한암스님은 뭍스님들에게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는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라고 경책하였습니다. 이러한 한암스님의 경책은 경허스님의 이행(異行)처럼 서투르게 깨달아 무애행(無碍行)이라는 탈을 쓴 이행(異行)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습니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습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그의 문하에 한암, 만공, 수월, 혜월 등 수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전국적으로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 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입니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 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됩니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 일 새벽에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셨습니다. 세속나이 64세, 법랍 56세였습니다.

저서에는 제자들이 역은 <경허집>과  <선문촬요> 등이 있습니다.

* 참고문헌: '황원갑의 고승과 명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다피아 고승열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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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eong Ho

Lee, Jeong Ho
Biography: Bachelor: Computer Science in Korea Univ. Master: Computer Science in KAIST Carrier: 1. Junior Researcher at Korea Telecom (2006 ~ 2010) 2. Researcher at Korea Institute of Nuclear Nonproliferation and Contro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