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조직의 작은 문화적 요소들이 쌓이고 쌓여서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역사가 좋아지는 것은 이러한 점들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되어서 인 것 같다.
나는 최근 개봉한 미드웨이란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영화의 기초가 되는 옥스포드에서 발간한 "The Battle of Midway"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는 이유가 무력이나 생산력에 있어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문화적인데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 둘 다 육군과 해군이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전략상 우선순위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육군과 해군이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하지만, 미국은 전략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협력을 이루어 낸다. 사피엔스라는 책을 쓴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 듯이,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적 생물이 된 이유는 수백만, 수천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협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란 확증편향적인 점이 없지 않지만,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알게된 단적인 사례들은 이러하다. 일본의 경우 해군이 태평양 전쟁에 나서지만, 육군은 중국 정복을 우선으로 해군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 책에 따르면, 일본 육군은 병력 지원요청만 하지 않으면 해군이 미국과 전쟁에 나서든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미 육군 역시 유럽에서의 독일을 상대한다는 전략을 우선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미 해군 역시 태평양에서 보다 대서양에서 독일 해군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시 태평양에 미 해군은 단 세 대의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하는 전단이 있었다. 이는 일본의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미 항모의 전투기들도 대부분 일차대전때 사용되던 기종으로 일본의 제로센에 비하여 성능이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태평양의 네 대 항모 중 두 대(Hornet과 Enterprise)를 이용하여, 미 육군의 B-25 폭격기를 싣고 일본 본토 폭격이라는 무리한 작전에 나선다. B-25 폭격기는 항모에서 겨우 이륙할 수는 있지만, 착륙은 할 수 없었다. 또한, 항모의 격납공간에서 상판 활주로로 비행기를 이동시키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 상판 활주로에 크레인을 이용하여 싣고 항모를 출항시킨다. 이 말은 B-25를 실은 항모는 작전 중에 다른 비행기를 출격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다른 항공모함의 호위가 필요한 것이다. 작전 계획은 이러했다. 항모에서 이륙한 B-25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한 후,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가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인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으로 날아가기로 방향을 작전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진주만을 공급한 일본에 대하여 반격한다는 의미 이외의 전략적 의미도 없었다. 후대에 논란이 되는 이 작전을 미국은 해군과 육군이 협력해서 해 내는 것이다.
미 항모 Hornet에서 출발한 16대의 B-25 폭격기(각 폭격기에 5명씩 탑승)는 모두 성공적으로 일본 본토에 폭격을 마치고 대부분 중국, 한 대는 러시아로 향한다. 폭격에 참여한 미군 80명 중 73명은 무사히 미국으로 귀환했지만, 나머지는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기도 하는 등 돌아오지 못했다.
만약, 이 작전을 일본이 알아차리고, 미국 항모를 격파했으면, 아마 태평양 전쟁의 방향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운이 일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최근 개봉한 미드웨이란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영화의 기초가 되는 옥스포드에서 발간한 "The Battle of Midway"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는 이유가 무력이나 생산력에 있어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문화적인데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 둘 다 육군과 해군이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전략상 우선순위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육군과 해군이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하지만, 미국은 전략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협력을 이루어 낸다. 사피엔스라는 책을 쓴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 듯이,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적 생물이 된 이유는 수백만, 수천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협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란 확증편향적인 점이 없지 않지만,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알게된 단적인 사례들은 이러하다. 일본의 경우 해군이 태평양 전쟁에 나서지만, 육군은 중국 정복을 우선으로 해군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 책에 따르면, 일본 육군은 병력 지원요청만 하지 않으면 해군이 미국과 전쟁에 나서든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미 육군 역시 유럽에서의 독일을 상대한다는 전략을 우선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미 해군 역시 태평양에서 보다 대서양에서 독일 해군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시 태평양에 미 해군은 단 세 대의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하는 전단이 있었다. 이는 일본의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미 항모의 전투기들도 대부분 일차대전때 사용되던 기종으로 일본의 제로센에 비하여 성능이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태평양의 네 대 항모 중 두 대(Hornet과 Enterprise)를 이용하여, 미 육군의 B-25 폭격기를 싣고 일본 본토 폭격이라는 무리한 작전에 나선다. B-25 폭격기는 항모에서 겨우 이륙할 수는 있지만, 착륙은 할 수 없었다. 또한, 항모의 격납공간에서 상판 활주로로 비행기를 이동시키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 상판 활주로에 크레인을 이용하여 싣고 항모를 출항시킨다. 이 말은 B-25를 실은 항모는 작전 중에 다른 비행기를 출격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다른 항공모함의 호위가 필요한 것이다. 작전 계획은 이러했다. 항모에서 이륙한 B-25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한 후,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가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인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으로 날아가기로 방향을 작전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진주만을 공급한 일본에 대하여 반격한다는 의미 이외의 전략적 의미도 없었다. 후대에 논란이 되는 이 작전을 미국은 해군과 육군이 협력해서 해 내는 것이다.
미 항모 Hornet에서 출발한 16대의 B-25 폭격기(각 폭격기에 5명씩 탑승)는 모두 성공적으로 일본 본토에 폭격을 마치고 대부분 중국, 한 대는 러시아로 향한다. 폭격에 참여한 미군 80명 중 73명은 무사히 미국으로 귀환했지만, 나머지는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기도 하는 등 돌아오지 못했다.
만약, 이 작전을 일본이 알아차리고, 미국 항모를 격파했으면, 아마 태평양 전쟁의 방향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운이 일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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